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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Smith

Paul Smith에 관해


2019.08.05-09.09

7월에 DDP에서 열리는 Paul Smith의 전시회인 <Hello, My Name Is PAUL SMITH>를 보고 온 뒤, 폴 스미스라는 사람에 대해 더 궁금해졌고 자세히 알고싶었다. 책과 잡지 등을 통해 폴 스미스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아보았다. 조금 더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폴 스미스에 관해 나만의 글을 써보려고한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짧게나마 소개하려고 한다. 


  폴 스미스는 1946년, 노팅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Harold Smith에게 키, 사진에 대한 관심, 사람을 대하는 방식 등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으로, 집집마다 의류 및 다른 제품을 할부로 판매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인물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직업인만큼 그는 손님의 지불 능력 이상의 물건을 팔지 않았다. 폴 스미스는 중학생 때까지 성적이 좋았지만, 열다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의류 창고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사이클링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고로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사이클 선수의 꿈은 접어야만 했다. 그는 퇴원 후, 의류 창고로 돌아와 쇼룸을 디스플레이 하기 시작면서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960년대 스미스는 펍에서 술을 마시며 예술을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모더니즘, 디자인, 예술에 대해 배우며 점점 빠져 들었다.그러던 중 펍에 있었던 패션 전공 학생 중 한 명은 노팅엄에 가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았고 스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스미스는 창고 일을 그만 두고 가게를 낼 장소를 찾고, 임대 계약을 맺고, 인테리어를 장식하고, 가게 운영을 도왔다. 이 때 스미스는 Pauline Denyer라는 예술 학교의 강사와 친해졌다.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패션을 전공한 그녀는 스미스의 여자친구, 사업 파트너,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녀는 런던에서 기성복 패션을 디자인하였는데 스미스가 일구어낸 모든 것과 그의 정체성은 둘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스미스에게 패션 사업의 기초를 가르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였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데니어는 예술 학교에 전임 강사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정으로 스미스는 자신의 의상을 제작하고 판매하여, 매장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스미스는 자신이 직접 입을 수 있는 옷을 판매하고 싶었고 그가 원하는 제품이 없으면 직접 디자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업은 1974년에 공개 기업으로 정식 설립되었다. 스미스는 점점 주목을 받으며 지나치게 대담한 패션은 부담스러우면서도 틀에 박힌 기존의 옷에 식상한 남성들을 중심으로 고정 고객들을 확보해나갔다. 스미스는 옷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매장을 호기심으로 자극하는 물건들로 채워 끊임없이 바뀌는 박물관 전시처럼 꾸몄다.
  폴 스미스는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 런던에 있을 때는 보통 새벽 6시 이전에 일어나 수영을 즐긴다고 한다. 그는 런던에 없는 날이 더 많다고 하는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원단을 구매하기 위해 출장을 자주 떠난다. 밀라노에서 매년 열리는 무역 박람회와 파리의 Premiervision으로 출장을 자주 떠난다. 또한 한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에 입점한 매장에도 방문해야 되기 때문에 출장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폴 스미스에게는 수십 년 동안 어디든 들고 다니는 푸른색 줄이 그어진 수첩이 있다. 그는 매 순간마다 자신의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수한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메모로 기록한다. 그가 메모하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비서가 모든 메모를 조심스럽게 보관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그의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한다. 
  폴 스미스는 2000년부터 코벤트 가든의 빅토리아 시대 풍의 건물에 본사를 두고 있다. 가장 꼭대기 층에는 스미스의 두 사무실이 있다. 두 공간 중 하나는 비교적 정돈되어 있다. 모던 이탈리아 가구들로 풍겨지는 고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곳은 휴식을 취하면서 긴장을 풀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휴식을 취하거나 긴장을 푸는 성격이 아니여서인지 거의 항상 비어있다고 한다. 런던에 있을 때 그는 쉬지 않고 건물 안을 돌아다니고, 색상 조합을 살펴본다고 한다. 두 번째 공간은 스미스가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스미스의 직속 팀, 디자이너들, 기자나 방문객들이 오간다. 디자인 미팅, 회의를 하고 원단 주문을 확정한다. 스미스의 책상 위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있다. 전세계 곳곳에서 익명의 팬들이 보낸 선물들이 한가득 있는데, 우표를 잔뜩 붙인 커다란 닭 인형, 지팡이, 수상스키, 소방울 등 신기하고 희한한 물건들을 보내왔다. 이 공간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스미스가 생각하는 방식, 색상, 패턴, 영감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고 결정되는 방식이 모두 담겨있다. 그리고 아래층에 있는 다른 디자인 스튜디오들 보다 약간 더 어지럽혀져 있다. 일부 다른 디자인 스튜디오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보통 주변이 잘 정리되지 않은 모습은 그와 비슷하다. 
  폴 스미스는 컴퓨터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전화기를 좋아하지 않아 휴대폰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아이러니함을 가지고 있다.  수영과 사이클링을 하며 보냈던 세월 덕분인지 그는 193cm의 큰 키에 좋은 체격을 가졌다. 자전거 경주에 나가기 위해 훈련하다가 길 끝에 주차된 차에 부딪힌 흔적이 코에 아직도 남아있다. 다리가 여러 군데 부러지고 코까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가 몇 달 동안 입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의 옷을 설명할 때 "계층 없는"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노팅엄 초기 작업 시절, 특권 계층의 절제된 옷을 눈여겨보고 그러한 옷에 더욱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엘리트 주의와 연관된 불편한 요소를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1981년 영국 전통 체크 패턴 원단으로 작업했던 그 순간은 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이 때 그는 규격을 살짝 벗어난 비율과 색상을 사용했다. 그 당시 그는 '클래식의 변형'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여성복 사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업적인 면과 창의성에서 신중함을 타고났는데 두 영역에서 지나치게 뻗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의 브랜드는 설립자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브랜드이다. 폴 스미스는 타이포그래피나 로고가 아닌 서명으로 사용된다. 이 서명은 사실 스미스가 직접 만들지 않았고 친구의 필체로 만들어져 여러 해 동안 다양한 변형을 거쳤다. 스미스 작품의 특징 중 한가지는 실제로 옷을 입은 사람만이 인식할 수 있는 포인트이다. 차분한 회색 수트에 19세기 파리의 거리 지도를 기반으로 한 무늬가 안감에 자수되어 있는데, 이는 제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적의 영토에서 격추될 수 있는 공군을 위해 비행 자켓 안감에 지도를 박음질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매장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구매보다도 매장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기를 바랬다.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그는 매장에서 직접 디스플레이를 손보고 양말과 넥타이를 정리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입었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가지 않는 물건은 무엇인지를 항상 둘러보고 있었다. 의류 옆에는 판매할 것 같지 않은 엉뚱한 물건들을 끊임없이 바꾸어 배치하며 고객이 함께 참여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스미스는 패션의 세계에서는 정체해서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빠르게 파악해서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를 주고있다. 패션 브랜드의 필수 전략은 전통과 혁신의 조화이다. 새로움과 초기의 브랜드를 형성한 독창성을 유지하려면 계속 변화해야한다. 패션 디자이너는 레이블의 본질에 전통성을 적당히 보존해야 하며, 반복적인 공식에서 벗어나도록 창조적인 기질과 실험성도 유지해야 한다. 
  스미스의 옷에는 서명과 필적이 새겨져있다. 익살스러운 제스처와 수작업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고객들이 제품에서 가장 많이 접촉하는 부분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셔츠, 커프스, 자켓의 단추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추 구멍을 강렬한 색상으로 사용하여 손 바느질로 꿰매어 장식하는 방법도 좋아한다. 
   1980년대에 다른 유망한 영국인 디자이너들이 실패했을 때, 스미스가 성공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패션에 대한 생각이었다. 패션쇼 무대 뒤에서는 납기를 맞추고 전체 프로세스를 진행할 수 있는 예산을 운영할 수 있도록 복잡하지만 잘 정리된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매장은 특색과 개성을 담아야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 컬렉션은 전략적 관점과 각자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필요하다. 스미스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폴 스미스가 지닌 능력은 관찰하고,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경이로움을 간직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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