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보훈지청 러시아독립사적지 탐방 4
2019.07.14-15
7월 14일 넷째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짐 정리를 하고 열차에서 내리니 하바롭스크 역이 보였다
하바롭스크는 극동 러시아에서 블라디보스톡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이다
'하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하바롭스크는 17세기 러시아의 탐험가 하바로프가 발견한 이래 극동지방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 지방행정, 산업, 교통의 중심지이다
1916년 아무르 교량이 건설되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사업이 종결되면서 하바롭스크 시는 방대한 러시아 극동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블라디보스톡이 혼잡한 도시의 분위기였다면 하바롭스크는 한적한 도시 분위기이다
하바롭스크는 천혜의 자연보고이자 극동 시베리아의 심장부로 볼거리가 많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무르강을 보기위해 하바롭스크로 간다고 한다
내리자마자 우리는 김알렉산드라 처형지이자 추모기념탑로 갔다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는 한인사회당 창건자이다
1917년 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다가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동맹을 결성할 때 참가하였다
1918년 처형되기 전 극동볼셰비키 당대회에 참가하여 하바롭스크시당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극동인민위원회의 외무위원장으로 인명되었다
이 곳은 1918~1920년 시베리아 내전 당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백위파와 외국 간섭 군에 의하여 처형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비문에는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항상 기억하라"라는 문구가 있다
우리는 다음으로 우초스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1918년 9월 김 알렉산드라가 백군에 피체된 이후 처형된 장소이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김 알렉산드라(Alexandra Kim)는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녀는 러시아 내 한국독립운동을 러시아 혁명세력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1918년 3월 개최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는 이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의 준비과정에 원동소비에트 정부 수상인 크라스노쇼코프(Krasnoshchyokov)의 지원이 있었다. 원동소비에트 정부 측에서도 일본·미국·영국·프랑스의 간섭군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는데 한인들의 지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회의는 볼셰비키와 연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뉘었고 찬성했던 이동휘·김립 등을 중심으로 1918년 5월 11일 한인사회당이 창당되었다. 한인사회당 창당 후 김 알렉산드라와 간부들은 당의 세력화에 나섰다. 각지에 한인사회당 간부들을 파견하여 지부를 설치하고 적위대를 모집하였다. 이렇게 모집된 100여 명의 한인 적위대는 백군인 칼미코프(Kalmykov)군과 전투에 나섰다. 당시 백군의 전력이 우세하여 한인 적위대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고, 1918년 9월 하바로프스크마저 점령되면서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김 알렉산드라는 한인사회당원들과 함께 백군의 공세를 피해 배를 타고 아무르주로 피신하고자 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를 포함하여 유동열·이인섭·김립 등 10여 명은 하바로프스크가 점령되기 직전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백군에게 발각되어 하바로프스크로 회송되었다. 유동열·이인섭·김립 등은 신분을 상인으로 위장하여 석방되었으나, 김 알렉산드라와 러시아 볼셰비키들은 신분이 노출되었다. 결국 김 알렉산드라는 백군에 의하여 1918년 9월 총살되었다.
회의는 볼셰비키와 연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뉘었고 찬성했던 이동휘·김립 등을 중심으로 1918년 5월 11일 한인사회당이 창당되었다. 한인사회당 창당 후 김 알렉산드라와 간부들은 당의 세력화에 나섰다. 각지에 한인사회당 간부들을 파견하여 지부를 설치하고 적위대를 모집하였다. 이렇게 모집된 100여 명의 한인 적위대는 백군인 칼미코프(Kalmykov)군과 전투에 나섰다. 당시 백군의 전력이 우세하여 한인 적위대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고, 1918년 9월 하바로프스크마저 점령되면서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김 알렉산드라는 한인사회당원들과 함께 백군의 공세를 피해 배를 타고 아무르주로 피신하고자 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를 포함하여 유동열·이인섭·김립 등 10여 명은 하바로프스크가 점령되기 직전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백군에게 발각되어 하바로프스크로 회송되었다. 유동열·이인섭·김립 등은 신분을 상인으로 위장하여 석방되었으나, 김 알렉산드라와 러시아 볼셰비키들은 신분이 노출되었다. 결국 김 알렉산드라는 백군에 의하여 1918년 9월 총살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처 자료
자세히 보면 아까 말한 김 알렉산드라 처형지와 우초스 계곡 모두 김알렉산드라의 처형지라고 하는데
사실 김 알렉산드라를 처형한 곳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확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우초스는 아무르 강이 잘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무라비예프-아무르스키 총독의 동상이 있다
위의 사진에 있는 동상이 바로 무라비예프-아무르스키 총독의 동상이다
전망대에서 본 아무르강이다
중국에서는 헤이룽강, '흑룡강'이라고 부르는 아무르 강은 최상류부의 실카강과 오논강을 포함하면 길이 4,444km로 세계 8위의 아주 긴 강이다
전망대를 본 뒤 우리는 극동 미술관으로 갔다
극동 미술관은 아무르강의 강줄기를 따라서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하바롭스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로 손꼽히며 19세기말 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원래는 노동조합의 건물이었지만 1931년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1만 2000여 점의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다
평소에도 관심 많았던 필름카메라를 살 수 있었다
소련시절에 사용했던 필름카메라로 지금까지도 작동을 한다
극동 미술관을 다녀온 후 우리는 자유시간을 즐겼다
시나본이라는 세계 최대의 디저트 카페에 들려 아무거나 시켜먹었다
알고보니 한국에도 있는 카페로 시나몬 롤과 커피가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모든 단어가 러시아어로 되어있고 영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 소통에 힘들었다
카라멜 마끼야또와 비슷한 맛이 나 생각보다 괜찮았던 선택이었다
광장으로 나가면 보이는 성모 승천 대성당
처음 봤는데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낯이 많이 익는다
파란지붕으로 유명하고 하바롭스크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건물이라고 한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기 때문에 건물 양식이나 그림이 우리가 흔히 보는 천주교 성당과는 많이 달랐다
정교회는 성상 숭배를 금하는 대신, 성화에 절하고 입 맞추는 의식을 한다고 한다
카톨릭 신자들이 가끔 이곳에서 예수님의 성화인줄 알고 집에 모셔 놓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성화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한다
카톨릭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성인이거나 러시아 황제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성모승천 대성당 앞 광장에는 내전영웅 기념비가 있다
1918 ~1922년까지의 내전에서 활약한 영웅을 기념하는 비라고 한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를 위해 싸우는 붉은 군대와 군주제, 자본주의, 민주주의, 반민주주의 세력이 연합한 백군이 싸운 전투였다고 한다
레닌의 붉은 군대가 백군을 이기고 1923년 소련을 수립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확실히 블라디보스톡보다 거리가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일직선으로 된 도로가 굉장히 많았다
영화나 사진 속으로만 봤을법한 도로들이 아름답게 펼쳐져있다
길을 따라 올라오다보면 보이는 금빛 지붕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동방정교회,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이다
러시아에서 세번째로 크다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이다
황금색 돔과 새하얀 건물이 동화 속 궁전같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에서 본 아무르 강
자유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서 쉬고있던 중 창밖으로 놀이기구가 보여 저녁식사 후
조원들과 함께 가보자고 하였다
입장료가 무료인 탓인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부모님들과 함께 놀이기구 타러 온 아이들도 많았고 조깅을 하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농구 코트에서는 농구를 하고 있었고 축구장에서는 축구경기를 하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는 모습이 신기했다
회전 대관람차를 타기 위해서는 티켓을 사야하는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한 번쯤은 타볼 만 하다
아무르강이 한눈에 보이고 강 건너편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는 땅이 넓다
놀이공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내일 아침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위해 짐을 쌌다
7월 15일 다섯째날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하바롭스크 공항으로 떠났다
이렇게 우리의 경기동부보훈지청 러시아 탐방은 끝이 났다
답사를 마무리하며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나는 지체없이 러시아의 유적지 상황을 꼽을 것이다
러시아의 국외 독립운동사적지의 경우 많은 장소가 터만 남아 있거나, 건물은 있지만 다른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표지판 하나만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국외 독립운동지하면 중국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러시아보단 중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도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다
또한 많은 러시아 사적지들이 시내에 있기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고 사적지 간의 거리도 상당하기 때문에 방문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가서 보고 싶어도 시간이 되지 않아 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그 하나의 유적지만을 보기 위해 2-3시간 차를 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점이 제일 아쉬웠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고 이어나가야 한다
두번째로 답사를 하며 새로 알게된 내용으로는 많은 사회주의 사람들이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독립 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을 잘 다루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에 언급하신 약산 김원봉은 하루종일 논란거리가 될 정도로 논란이 일었다
해방 이후의 김원봉의 삶에 대해서는 비난을 할 수는 있지만 독립을 위해서 한 노력은 비난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독립 운동가들을 하나같이 기억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라서, 몸이 불편해서, 정치적 색깔이 달라서 독립운동가들을 덜 존경하고 덜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다
4박 5일간의 답사동안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독립운동 탐방을 통해 요즘 주변 사람들이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 많지만 미래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또한 미래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표본, 교훈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지루하다, 재미없다라는 역사에 대한 편견을 차근차근 바꿔나가려고 한다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에 중점을 두며 이 활동을 시작해본 것처럼 주변 사람들의 인식부터 천천히 바꿔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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